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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제시대에 강제 축소된
대한민국과 과거의 문화,역사들...
정상적인 발굴과 위상을 확보하기를 바란다.
이를 위해...서울대학교 사학과는 해체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.
대학 발굴팀의 첫타석 초대형 홈런…한국 역사 3만년 이상 소급했다
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ko8QvfdP5u0
이 영상은 구석기 시대의 역사적 발견과 연구를 다루고 있으며, 특히 한반도의 구석기 유물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조명합니다. 저자는 다양한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된 과정과 그 의미를 이야기하며, 구석기 시대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. 이를 통해 관객은 한국의 고고학적 역사와 인류의 발전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. 구석기 유물 발견의 역사적 맥락을 흥미롭게 전달하며, 시청자에게 학문적 호기심을 자극합니다. 이 콘텐츠는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, 구석기 시대 연구의 영향을 받는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.
핵심 용어
- 구석기 시대: 구석기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기로, 약 250만 년 전부터 시작되어 약 1만 년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. 이때 사람들은 주로 돌을 가공하여 만든 *석기 도구...
1. 서론 📚 역사 이야기의 시작과 저자 소개
- 저자는 "하이스토리 한국사"라는 책을 출간했고, 이 책은 역사 속 다양한 유물과 유적, 그리고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.
- 이 책은 독자들이 역사에 대한 상식을 넓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을 기대한다 .
- 저자는 역사 이야기를 통하여 히스토리에 대한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.
- 또한, 해석의 예로 기원전 44년 10월 22일의 역사적 의미를 언급하면서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각을 제공한다 .
2. 🏺 구석기 유물 발견의 역사적 전환점
- 1856년 독일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고, 이어 1859년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제시하게 된다 .
- 1929년 중국 베이징에서 발견된 '북경 원인'의 두개골은 50만 년 전 인류의 존재와 구석기 문화를 학계에 알려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.
- 1935년, 동관진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석기는 한반도 구석기 시대를 증명하는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고, 이후 일본 학계의 강한 반발이 있었다 .
- 1963년 북한의 굴포리 유적이 발견되면서 한반도에서 구석기 유물 발굴의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되었고, 이 유적지가 최초의 구석기 유적으로 인정받았다 .
- 이어 1964년, 앨버트 모아와 릴리 샘플 부부가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물을 발견하여 한국 고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.
2.1. 🧬 인류 진화에 대한 초기 발견
- 1856년, 독일 뒤셀도르프 인근 네안데르 골짜기 동굴에서 괴상한 화석이 다수 발견되었으며, 이는 인류 진화에 대한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된다 .
- 이전 유럽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날을 고수하고 있었고, 이로 인해 진화론과 창조론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.
- 이러한 발굴은 인류의 역사에 대한 기존 관념을 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.
2.2. 🦴 인류 진화의 고대 화석 발견과 그 의미
-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용어는 돌출 이마를 가진 고대 화석을 통해 처음 명명되었으며, 이는 인류 진화와 관련된 중요한 발견이다 .
- 1859년,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제시하자, 창조론자들은 인류의 기원이 원숭이에 연관된 것이라며 충격을 받았다 .
- 1891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발견된 괴상한 뼈는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 형태로 확인되어 '자바 직립 원인'이라 이름 지어졌다 .
- 1920년대에 중국 베이징 인근에서 출토된 두개골은 50만 년 전에 존재했던 고인류 '북경 원인'과 같이 구석기 문화를 더욱 명확하게 연결하는 단서가 되었다 .
- 1935년, 북한 함경북도에서 가공된 석기가 발견되어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 거주 여부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게 되었다 .
2.3. 🏺 동관진 유적의 발굴과 구석기 시대의 증명
- 1940년 동관진 유적의 발굴조사는 한반도 구석기 시대를 증명한 첫 번째 논문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.
- 1935년, 요꼬 야마 쇼자 교수는 경기도 문산의 가게에서 유사한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으나, 이를 최근에 제작된 것으로 오해하였다 .
- 이후, 인근 지역인 파주와 연천에서도 유사한 구석기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고대 인류의 도구로 확인되었다 .
- 그 당시 요꼬 야마 교수는 구석기 유물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.
2.4. 📜 일제 강점기와 구석기 문화의 왜곡
-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한국 문화의 타성과 정체성을 강조하고, 구석기 문화의 존재를 부정하고자 했던 배경이 있다.
- 일본 학계는 구석기 문화가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며, 이는 1949년 일본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기 전부터 강하게 주장되어 왔다.
- 특히, 1935년 동관진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에 대한 주장은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왔고, 이를 이유로 저자는 헌병대에 의해 구타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.
- 동관진에서 출토된 흑요석의 구석기 여부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, 신석기 시대와 혼합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.
2.5. 🏺 구석기 유적 발견의 역사적 전환점
- 1963년 5월 4일 북한의 노동신문에서 굴포리 구석기 유적의 발견 소식을 전하며, 이 유적이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 유적임을 강조한다 .
- 1929년 베이징 원인의 발굴 이후 정체되었던 구석기 연구가 이제 두만강을 넘어서 한반도 북부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.
- 미국인 앨버트 모아와 릴리 샘플 부부는 1962년부터 한국 탐사를 시작하여, 특히 석장리에서 많은 구석기 유물을 수집하였다 .
- 이들은 1963년 부산 동삼동의 신석기 유적지 발굴을 주도하며, 국내 학계에 외국인의 발굴 문제를 가져오게 한다 .
- 결국, 1964년 5월 27일, 모아와 순복이 교수가 석장리를 방문하여 구석기 유물을 발견하게 되면서 새로운 연구의 가능성이 열렸다 .
3. 🏺 석장리 발굴과 구석기 시대 연구의 기여
- 석장리는 한반도 남부에서 공식적으로 발견된 첫 번째 구석기로, 발굴은 연세대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졌으며, 김원령 교수와 선복이 교수가 발굴을 주도하였다 .
- 발굴 과정에서 돌날 도구, 주먹 도끼 등 구석기 유물이 풍부하게 발견되어 언론에 큰 보도를 받았고, 이는 한국의 구석기 역사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.
- 발굴된 유적의 연대가 약 3만 690년 전으로 확인되며, 후속 연구에 따라 이 연대는 7만에서 6만 년 전으로 추정되었다 .
- 북한의 고고학자도 남북한 간의 공동 연구 필요성을 제기하며 구석기 시대 유물 발견의 의의를 강조하였고, 이는 구석기 연구의 통합적 접근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.
- 석장리 발굴은 구석기인의 이동 경로를 증명하며, 후속 연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, 이러한 발견은 한국 고고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.
4. 결론 🎉 석장리 발굴 60주년 및 구석기 용어 정리의 성과
- 2024년 11월은 석장리 발굴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, 연세대와 석장리 박물관에서 다양한 기념 행사가 열린다 .
- 구석기 용어 정리에서 손보기 교수의 업적이 특히 눈에 띄며, 그는 기존의 제각각인 용어들을 한글로 명확하게 정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.
- 손 교수는 구석기 시대 다용도 칼과 같은 용어를 우리말로 간편하게 번역하여, 현재까지도 상당수의 용어가 통용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.
예를 들어, "주먹 독기"와 같은 기존 구석기 용어는 교수의 연구로 새롭게 정의되었으며, 일본식 및 중국식 용어 대신 한국어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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